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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력 과학자가 한마디"-현직 고등학교 역사교사의 이승만에 대한 비난/폄훼 글을 보면서

작성일
2013-02-24 00:00
작성자
강*희
조회수
2720
첨부파일
약간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래의 글 필독을 바라면서 소감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의 동네에 있는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 역사담당 교사가 20년 역사 수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글을 인터넷 홈페지에 올린 것을 며칠전에 읽고 그에 대한 반박글을 만들어 붙여 여기에 소개합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을 완전히 대한민국의 2등 국민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 교사는 이번 주에도 학생30명을 데리고 중국 현지답사 여행을 간다고 하면서 왜곡된 역사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고 너무도 당당하게 자기 실명과 고등학교 이름까지 밝히고 있어서 전화하여 만났지요. 약3시간에 걸친 대화를 하였으나 소신이 확실하더라구요. 이런 교사의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마음 속에 애국심이 싹틀 수 없지요. 육사생도의 37%가 미국을 주적이라고 대답했다는 설문조사를 보면 이런 교사들이 학교에 진을 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며칠 전에 프레스센터 어떤 모임에서 공무원들의 애국심이 없음을 개탄하고 서울대 경제학 교수 이영훈 박사에게 부탁하여 애국심을 키우는 [새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역사책]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애국자가 된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경제학 전문가가 역사책을 썼다는 것이 매우 시사하는 바 큽니다. 역사전문가들이 망쳐 놓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역사책을 우리 산업기술 전문가들도 각자 한권씩 써도록 합시다.

역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예술문화, 과학기술, 산업[농업, 공업, 건축, 상업, 무역, 전기, 반도체, 군사, 에너지, 스포츠 등] 을 종합한 것이며 사실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데 무슨 어려운 공식을 풀어야 하는 수학이나 물리화학의 공식을 다루는 학문과는 다르지요. 지금의 종북역사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집착하여 극히 일부분만을 취급하여 왜곡, 거짓, 날조된 것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서 시급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과학자 500만명은 국가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로서 위대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종북세력, 역사왜곡을 묵인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우리 500만 과학자들이 조금씩만 관심을 가지면 새역사운동의 물결을 만들어 불안해 하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마음 속에 애국심과 대한민국의 긍지를 가질 수 없으며 남북의 분단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2등 국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고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교육해야 할 것인지 다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BT팀 강국희 올림

아래 문제의 글은 2013.1.30 어떤 홈페이지에 올려졌던 것인데 저를 만난 다음날 2013.2.18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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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우남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항의 편지
고등학교 역사교사 김[ ]수


우남 이승만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2012년 현재 고등학교에서 20년째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내신 이승만 대통령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20년 동안 가르치면서 참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1919년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옳고 그름이 제대로 된 정의가 바로선 나라가 나라를 건설했어야할 제1공화국이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듣기에 다소 불편하시고 변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겠으나, 대통령께서 불명예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신 지 50년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고, 21세기에 미래 세대들을 가르치면서 우리 역사에 무언가 잘잘못을 따질 필요성이 있기에 당당하게 편지를 올립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 입장보다는 역사의 옳고 그름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바른 행동으로 이끌어야하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자 입장에서 몇 말씀을 올림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대통령께서 6.25 때 달랑 편지 한 장으로 대한민국의 군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 넘긴 경우를 되돌아 보건데, 편지라는 형식의 가벼운 글도 쓰는 위치에 따라 엄청난 역사적 결과를 초래함을 인식하며 당신은 ‘참 편하게 대통령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해방된 이후의 당신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해방 이전의 여러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게 많으나, 해방 이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역사를 가르치다보니 무언가 당신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특히, 당신이 대한민국의 주춧돌을 잘못 놓는 바람에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집은 항상 삐걱거리고 흔들립니다. 더 높은 큰 집을 짓고 싶으면 다시 한 번 주춧돌을 보강하는 공사를 해야 한답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만약에 당신께서 친일파들과 손잡지 않고 제대로 친일청산을 했더라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도록 했더라면, 또 장기집권을 획책하지 않고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면,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비를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도 훨씬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대한민국이 되었을 겁니다.

당신이 개인적인 욕심에서 시작한 헌법 무너뜨리기, 1인 독재 지배체제, 각종 권력 비리 등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잘못은, 이후로도 관행처럼 수십 년을 이어져 당신이 물러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바로잡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신이 정치에 이용하며 키워 놓은 친일파 후손들이 당신을 그렇게 추종하면서, 당신의 과거를 이렇게 다시 들추게끔 당신을 현양하려 하고 있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입니다. 당신 추종자들은 당신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종하려하지만, 오히려 많은 역사학자들은 당신을 결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해방된 조국을 당신은 또다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친일파들은 당신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다고 하지만, 결국 당신이 주장한 ‘반공’은 당신 권력을 위한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지사들을 ‘빨갱이’로 몰고, 친일 세력들을 반공주의자로 둔갑시켜 미국의 앞잡이로 만듦으로써 민족정기가 훼손되었습니다.

더욱, 몽양 여운형과 고하 송진우 암살에 이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은 대통령인 당신에게 많은 의문점이 남습니다.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당신이 비호해서 호의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안두희도 늙은 몸으로 당신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영원히 당신은 암살자를 비호한 파렴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4.19혁명 성공 후 기뻐하는 시민들

당신은 또 민족 분단의 책임도 면치 못합니다. 당신은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항상 북진 통일을 외쳤습니다. 정말 북진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야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허무맹랑한 과장은 결국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지킬 책임감은 있으셨나요? 제대로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면 전쟁에 제대로 대비를 했어야 했지요. 전쟁을 억제할 정도의 군사력을 가졌어야지요. 결국 김일성에게 오판을 하게 함으로써 동족상잔의 6.25는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말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수 백 만의 군인과 민간인의 죽음은 이후 60여년이 흐른 지금도, 남북 사이의 증오심이 계속되어 ‘친북’, ‘종북’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념 논쟁을 하는 곳이 돼버렸습니다. 1992년 소련이 붕괴되어 공산주의가 사실상 지구상에서 의미 없게 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또 당신은 전쟁 중에는 한강다리 폭파로 수많은 피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수 천 명을 죽게 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등 차마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역겨운 사건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또 어떠했을까요?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3.15 부정선거 등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세계인들에게 낯부끄러운 짓들을 너무나 쉽게 했지요.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면 빨갱이 소행 운운 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았지요. 3.15 부정선거를 몰랐다고 발뺌하셨는데 정말 모르셨나요? 모르셨다면 치매에 걸린 80대 노인이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죽산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 사건은 꼭 그렇게 했어야했나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되는 ‘평화통일’이 당신의 ‘북진통일’에 맞지 않는다고 사법 살인을 저지르셨네요. 당신은 평화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인물이었네요.

정리해보니 당신은 역사적으로 정말 잘 한 게 하나도 없는 국가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부끄러운 대통령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끼친 당신의 해악 중에 최악은 물론 3.15 부정선거와 독재이지만, 저는 민족정기 차원에서 친일 세력을 두둔했다는 것이 최고로 나쁜 것이었다고 하고 싶습니다. 나라를 팔아먹고도, 매국 행위자들도 벌 받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세상에서는 어떠한 잘못도 처벌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망명지 하와이에서 병석에 누운 이승만

결국, 지금 21세기의 세계 독재자들의 말로와 비교해 보면 하와이로 망명하여 쓸쓸하게 최후를 맞은 것도 당신에게는 행운인겁니다.

역사에는 준엄하게 다 기록됩니다. 역사가 바로선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잘못들이 철저하게 밝혀지고, 기록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질 것입니다. 저승에서나마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시길 기원합니다.

2012년 11월 어느 날 고등학교 <한국사>의 현대 부분을 20년째 가르치는
대한민국의 한 역사교사 올림

김[ ]수
고등학교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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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선생의 글에 대한 반론
?姜國熙 kauthead@gmail.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연구회의 홈페이지[cafe.daum.net/kpgs27]에 실려있던 고등학교 역사담당 교사의 2013.1.30 글을 읽고[2012.2.18현재 삭제됨] 우리역사 인식의 문제가 매우 긴급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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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현대사의 역사문제에 대한 정반대의 인식을 하고 있는 역사전문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들 사이에서 영향을 받은 학생들, 젊은이들,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분열되어 있음은 단순히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핑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될 국가 존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김 선생의 글에서 몇가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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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일성의 6.25남침 전쟁시에 대한민국의 군작전지휘권을 미국에 넘긴 것을 비난했는데
반론-김일성의 6.25남침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하여 16개국이 참전했습니다. 우리군대와 유엔군 16개국이 단일 지휘체제를 구축하여 김일성 남침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시는 것 같군요. 그것이 원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대전협정[對戰協定]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1950.10.1 우리 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에게 북진을 명령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
만약 6.25전쟁 당시 무기, 군사조직 등 군사체제가 불비하고 전쟁 수행 능력도 전혀 없는 한국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을 상대로 전쟁 작전권을 행사했다면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어떻게 도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나 영국의 연합군이 대한민국만 못해서 전시 작전권을 미국에 넘겼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처럼 자주 국방을 국가의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전시작전권을 주장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도 세계사에서 자취도 없이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국군의 능력을 충분히 파악하여 훌륭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군작전권을 미군 맥아더사령부에 넘겨서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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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북한의 군사력이 월등히 강력한 상태였으므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작전권을 유엔군에 넘긴 것이며 그래서 북한공산군을 38선까지 밀어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그 당시 우리 군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하다가 여기에 유엔참전 16개국이 참여하게 되면 의사소통과 작전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승만은 과감하게 작전권을 맥아더에게 넘겨서 성공적으로 수행했지요. 북괴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해 내려왔을 때 세계최고의 미국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 성공함으로써 독안의 쥐 신세가 된 공산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전멸하였고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대한민국을 사수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승만의 놀라운 판단력에 대한민국이 기사회생했는데 왜 자랑스럽게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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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의 시작이 잘못되었고 주춧돌을 잘 못 놓았으니 다시 주춧돌을 보강해야 한다고 했는데 대하여
반론-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해방직후 남은 미국, 북은 소련의 지배하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어떤 국가의 주춧돌을 놓았어야 했는지요. 그리고 보강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강해야 하는지 의견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1948.4.28-29북조선 헌법통과, 이것은 1936년 스탈린이 제정한 소비에트헌법에 기초한 것이며 소련의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요.. 대한민국의 헌법은 1948.5.29제헌국회[초대국회의장 이승만]에서 제정되었지요. 비로소 대한민국은 자유평등사상, 자유민주공화국,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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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8.15해방은 일제가 포츠담선언을 수용하여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결과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와 세계평화기구로 유엔이 창설되었습니다. 따라서 1947.1.14 유엔총회가 한국문제의 해결은 한국민의 자결에 맡긴다는 결의에 따라서 1948.5.10 유엔한국위원단의 관리하에 제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인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남북분단은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이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민족문제의 해결을 몇사람의 협상으로 결정하자는 것은 반민주적 사고방식이지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나라로써 김일성조선왕조국이 못된 것이 그렇게도 원통하단 말입니까?

이승만의 통일론은 처음에는 <선통일 후정부수립>이었습니다. 1945.10.19 “우리에게 급한 문제는 잃었던 3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 유일한 것이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통일뿐이다. 여하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잃은 땅을 찾는 일에 전력할 뿐이다”라고 원론적인 통일론을 제시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1946. 4.8 기자회견에서는 “38선을 철폐하여 다시 통일을 회복하도록 이 회의에서 결정되기를 바란다”고 발언하여 <선통일 후정부수립>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결열되자, 이승만의 통일론은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라는 단계적 통일론으로 전환됩니다. 이승만이 총선거를 주장한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며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門路를 열자는 것이었으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까지 말 했지마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그 당시 국제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았으며 청년시절에 배재학당 공부, 미국에서 외교정치학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독립 후의 국가를 건설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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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일청산을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도록 했으면 좋았다, 장기집권을 획책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면 좋았다, 한국전쟁에 대비를 못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대하여
반론-김일성[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은 1947.3.7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토지무상몰수, 무상분배, 계급혁명추진을 했지만 초대내각 18명중에서 친일분자17명을 포함시켰으며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친일파로 처형했지요. 북한이 친일청산을 잘 했다는 것은 완전 거짓이며 허구입니다.
김일성 - 소련군 소령 출신! 독립운동과는 전혀 무관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2위, 김일성 친동생 (일제 헌병의 통역관,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저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즉 일본간첩 출신)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유명 무용수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 소위)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대 복무)
한희진-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당시 함흥철도공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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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공로자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하였고[아래내각명단참조] 친일세력 청산을 위하여 1948.9.22 반민족행위특별법 법령제3호를 제정하여 법에 의한 절차를 거쳐서 청산하였지요. 법률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682건을 조사하였고 영장발부408건, 기소221건, 재판종결38건, 처벌12건을 소추 처리하였지요. 이승만의 토지 개혁는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농민들이 만족하였고 그래서 빨갱이들이 농민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청산작업이 진행 중에 김일성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대한민국 수호가 더 시급한 상황이 되었기에 친일청산은 연기되고 말았지요. 친일 청산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김일성의 남침때문이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북한보다는 남한이 제대로 잘 한 것이지요. 친일에서 최대 공로자는 김일성이라고 볼 수 있지요. 왜냐하면 6.25남침으로 인하여 일본에서는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재무장, 엄청난 경제발전을 하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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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집권 획책, 3.15부정선거는 분명히 잘못이지요. 다만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승만정부의 국가설계가 자유민주주의[교육진흥, 언론자유, 종교자유---]에 기초하여 매우 잘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의 민주주의 정신이 살아나서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성취한 것이며 이러한 국민교육의 공로는 이승만의 치적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이승만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확인하고 즉시 하야, 그 다음날 대통령 전용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이화장으로 떠난 분이며 축재를 하지 않았고 그런 분을 독재자라고만 매도하는 것은 그 시대상황을 고려해 볼 때 지나치다고 봅니다.

그 시대의 독립국가들 중에 북한,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터키, 인도 등--- 여러나라가 있었지만 우리나라만큼 민주화, 산업화를 거쳐 선진화로 발전한 나라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이승만과 비교되는 김일성은 철저한 공산주의 1인독재 왕조체제를 구축하였고 그래서 북한인민들에게는 신앙, 교육, 언론, 경제, 주거의 자유가 없어서 권력층의 부정부패, 축재, 축첩, 인민탄압에 대한 비판, 시위가 불가능하여 300만명이 굶어죽고 탈북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참고하면서 우리의 문제를 비교분석해야 합니다.

또 6.25한국전쟁에 제대로 대비를 못해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했는데 이 전쟁의 책임을 묻는다면 김일성을 책망해야지요. 1945.9.14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는 인민정부수립요강을 발표하였고 북한 공산정권수립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제주4.3폭동, 여수순천반란사건, 대구폭동사건, 등의 혼란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국내치안 유지에 필요한 군경의 확보도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남침을 대비하지 못하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일성은 자체의 군대만으로는 남침이 어렵다고 봐서 스탈린, 모택동을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승낙을 얻고 막대한 전쟁물자와 무기를 지원 받았지요. 전쟁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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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3부 요인
[행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 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
내무장관 윤치영(尹致暎) -일제시대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
법부장관 이인(李仁)- 항일변호사
국방장관 이범석(李範奭) 겸임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씨는 철학교수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씨는 공산당에서 전향한 사람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이고 교육가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교통전문가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북한에서 항일 기독교 목사로 일했고 조만식 선생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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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부]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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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대법원장 김병로-항일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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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헌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지배체제, 각종 권력 비리의 문제에 대하여
반론-이승만은 국민의 민주주의 교육과 의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대통령 중심제, 직접선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였고 심지어 전쟁 중에도 국회를 열었으며 언론 통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승만의 청년시절 29세 때?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 미래 독립국가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승만의 청렴한 생활과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던 점을 그 당대의 다른 독립국가의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자랑꺼리입니다. 권력층의 비리문제는 이승만의 개인문제가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국민관습이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개인생각으로 이승만의 업적 중에 가장 으뜸은 독립국가의 설계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로 했다는 점이고 그 다음은 혼란했던 해방정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압하고 굳건한 나라기반을 세웠다는 점입니다. 토지개혁의 성공으로 농민들이 만족하였고 그래서 빨갱이들이 농민들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으며 북한공산군과의 6.25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도 왜놈들의 독도침탈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독도를 실효지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김일성의 6.25남침 직전에 군부대의 남로당 좌익을 대거 숙청하여 공산화의 위기를 모면하였던 점, 기독교 정신으로 건국하여 세계선교를 이끌어가는 나라로 발전되었고 우수국민교육의 정책추진으로 인재를 많이 육성하여 글로벌시대에 세계적인 인재수출이 가능하게 된 점들은 이승만의 국가정책이 지금에 와서 꽃을 피우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승만의 국가정책 4대 원칙은 주권재민공화제, 자유민주주의, 과학문명의 개방성, 세계시장의 평화적 이용이었으며 이것을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공약에서 그대로 이어받아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하고 대통령제 실현지속, 과학육성, 경제발전으로 계승하였지요. ?

5. 일제시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해방 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민족정기를 훼손했고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았다고 한데 대하여
반론-일제시대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비폭력운동,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협조를 구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요. 김구는 무력적인 수단만을 앞세웠지요.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았다는 것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지나친 면이 보이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 김일성의 첩자들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고 하는 남로당과 같은 세력을 그냥 두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벌써 공산화되었겠지요. 1997.5.26로동신문특집보도에 의하면 1949년의 국회프락치 사건, 조봉암포섭사건, 6.25직전 군부대와해공작은 국방부 각기관 정보망 구축의 핵심 분자 성시백의 간첩활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1948년 김구가 김일성의 남북협상 초청장을 성시백으로 부터 전달받고 방북 후에는 이승만과 갈라서게 되었으며 김구는 끝까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했지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바라는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저격을 당했지요. 김구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정부수립 방해자일 뿐입니다. 김구는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서 민족통일만 부르짖었을 뿐이지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였습니다. 1948.8.15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도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애국세력에게 미움을 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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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든 것이 아니고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미국의 힘을 빌린 것이지요. 미국은 우리에게 독립의 선물을 안겨 주었고 미군정은 3년 동안에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스탈린의 북한 공산화로 불가능하게 되자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유엔의 지원을 받도록 하였으며 6.25남침 시에는 신속하게 유엔군을 참전시켜 북괴군을 퇴치시켰으니 얼마나 훌륭한 전략가입니까!

이승만의 비폭력 독립운동은 여타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1940년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기다]책에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우리의 독립을 확신하였지요. “우리가 감히 예상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 보다 더 일찍,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의 팽창을 꺾고 일본 영토 안으로 그들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다시 올 것이다. 그 때 우리 한반도는 전 세계의 자유국가들과 나란히 설 것이다. 그 때 우리 한반도는 또다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서 세계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일찍부터 이승만은 독립에 대한 꿈과 실력배양에 힘썼지요. 1897.7.8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영어연설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큰 호응을 얻었고 그후 주간신문 협성회보 발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러시아 야욕규탄 대중연설, 1904년 감옥에서 5년7개월 동안 손톱 발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미래독립국가를 구상하면서 집필한 책[독립정신]에 모든 국가의 설계도가 담겨 있는 것만 봐도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면을 이해할 수 있지요. 감옥생활하면서도 감옥학교와 도서관 설치운영을 특별 허가 받고 죄수들의 교육에 힘썼지요.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직접 실천하신 분이지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YMCA설립에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 애비슨, 게일, 언더우드, 질레트들과 함께 국제적 세계기구로 발전시키면서 일제탄압 저항운동의 기둥 역할을 하였지요.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루르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협조요청, 해외독립운동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은 조선의 멸망을 바라 보면서 독립 후의 나라는 기독교 정신으로 건설할 것을 구상했습니다. 독립선언서 33인중에 기독교인 16명이 참여하여 조건을 세움으로써 6.25전쟁시 유엔군 참여국 16개국으로 이어진 것은 신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승만의 평생의 삶과 정치행위는 처음부터 국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정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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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운형, 송진우, 김구, 등의 암살에 이승만을 의심하는데 대하여
반론-그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이승만에게 의혹을 보내는 것은 무리하다고 봅니다. 북한에서는 법적 절차 없이 인민재판을 하였으며 당의 지령대로 죄질을 묻지 않고 사람을 처형했지요. 그 당시 남한의 사법부는 법집행의 절차에 따라서 판결했으므로 그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1945.12.30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 암살, 신탁찬성, 1947.7여운형[중도주의]암살은 서울 혜화동 교차로에서 한지근 (19세) 청년의 권총에 맞아 사망, 1947.12.2 장덕수의 암살범은 김구가 지도한 비상국민회의 소속의 박왕옥과 한독당 배희범이며 장덕수는 신탁 찬성, 남한단독정부 수립 찬성이었지요. 1949.6.26 김구가 육군소위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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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었습니다.
공산당 책임비서 초대 부수상 박헌영의 처형, 조선노동당 중앙위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테러 후 퇴진 강요,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허가이 자살 위장 암살, 내각 부수상 박의완 폭행 후 행방불명, 부수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우, 노동당 부위원장 주영하선 학살, 부수상 김책 사고사 위장 암살, 6.25전쟁 피랍인사 정치인 조소앙과 최승희, 한설야, 이태준, 임화 등의 예술인과 작가들 숙청, 군 장성 출신으로 대장 : 박일우, 김웅, 중장 : 박춘일, 이권무, 왕연, 방호산, 장평산, 소장 : 김창덕, 김한중, 김익성 등 연안파 장성들 학살 숙청, 대장 : 남일 암살, 상장 : 최종학, 중장 : 김렬, 소장 : 정학중, 박창옥 등 소련파 장성들 숙청, 소장 : 강태우, 표무원 등 월북 장성 학살, 대장 : 김광협, 김창봉, 상장 : 석산, 최용진 등 김일성의 동북항일련 항일빨치산 출신 장성 숙청 등 6.25전쟁 참전 장성중 75명을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하였고, 북조선정권 수립 당시 내각 22명중 17명을 사형, 암살 등으로 숙청 하는 등 수많은 인사들이 암살, 처형 등으로 가족들과 함께 숙청되었습니다. 김일성 세습 왕조 구축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소속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피비린내 나는 ‘피의 숙청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1인 독재국가이므로 아무런 저항이나 비판을 받지 않고도 독재자 마음대로 정적의 숙청을 할 수 있고 또한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숙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은 개방된 사회이고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서 보장된 국가이므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드라도 암살이나 숙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며, 따라서 근거 없이 무조건 이승만에게 의혹을 덮어씌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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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주장인 통일국가는 세계사의 흐름도 파악하지 못한 단견이며 어떠한 정체성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안도 없이 막연한 민족 통일이었지요. 그기에 비해서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 하에 공산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안을 가지고 있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 하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힘으로 독립된 신생국가 한반도는 소련의 공산국가나 미국의 민주국가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세계사적인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우리 마음대로 정체성도 없는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조차 미국의 영향을 받는 서방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구 공산주의 국가 -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당시 소련의 점령 하에 있던 지역은 모두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38선 이북은 소련의 점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끼리 통일한다고 하면 공산국가가 되는 것이 필연이었고 그게 세계사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러자면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국의 양보가 있어야 했는데 과연 우리 마음대로 공산국가가 되는 것을 미국이 바라보고만 있었겠습니까?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국가를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김구가 도저히 이승만을 따라갈 수 없는 이상주의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에는 틀림없으나 국가를 경영할만한 경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봅니다. 백범일지 등 어떤 자료를 봐도 국가경영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이 없습니다.

해방이 된 이 땅에 1945년 11월 23일 귀국하신 후 1949년 6월 26일 흉탄에 쓰러지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 경영에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요? 남로당이 준동한 사회 혼란기에 김구가 한 행적이 무엇인가요?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준비된 민족지도자라고 보기에는 아리송할 뿐입니다. 아마 암살되지 않고 살아 계셨더라면 1년 뒤에 일어난 6.25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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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일성에게 오판을 하게하여 6.25전쟁이 발생했다고 한데 대하여
반론-일 리가 있는 것 처럼 주장하시만 김일성의 의도된 남침 야욕을 책망하여야 하지 않는가요.
1949.3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보면 치밀하게 진행되었지요.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 방문, 스탈린과 남한 침략 협의, 남한 군부 내에 빨갱이 상당수 있음을 김일성-박헌영이 스탈린에게 보고/인정받았고 현금3000만 달러지원, 소총15000정, 각종 포139문, T-34전차87대, 비행기94대 등 무기를 대량지원 받았으며 국제환경이 남침에 유리하다고 판단, 스탈린이 남침 허락, 중국의 모택동 동의를 얻도록 권유하여, 1950.5김일성과 박헌영은 중국 모택동방문, 스탈린과의 회담결과를 보고하자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확인 요청, 스탈린은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창에 동의하며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하라고 권했지요.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6월16일 최종 승인, 김일성은 남침일자를 6월 25일로 결정하였다지요. 이렇게 모든 자료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북학자들은 6.25를 북침이라고 우기는데 김 선생도 그러한 분들의 주장에 같은 입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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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소련 방문 시 통역 유성철은 소련동포3세, KGB요원,으로 근무하다가 북한에 입국하여 군부 고위직에 참여하였으며, 6.25남침 소련군작전모의에도 참여했지만 6.25전쟁 후에 숙청당하여, 소련으로 망명, 반 김일성체제 운동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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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승만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잘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고 했는데
반론-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하네요.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정의에 실패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말했는데 비슷한 논리라고 봅니다. 대통령의 임기 중에 어찌 잘 한 것이 한가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말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혀 역사 공부를 하지 않고 오로지 반대한민국 이념운동에 몰입하고 있는 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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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분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북한은 장거리미사일과 핵폭탄을 개발하여 기회만 있으면 ‘서울 불바다’를 외치고 있는 이런 각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국민에게 올바른 교육을 수행하여 참된 역사관을 심어 주어야할 의무가 있는 역사 선생님께서 우리 현대사를 왜곡하여 혹세무민하시면 우리 대한민국은 아디로 가게 될 것입니까?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면 이런 선생님들은 역사관을 종북사관에서 민주사관으로 바꾸시든지 아니면 잘 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에서 손을 놓으시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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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 선생은 역사의 진실을 잘 못 이해하시고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당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무력 투쟁에 열중하였으며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이승만을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김구는 통일국가만 주장하고 끝까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였지요. 김구는 소련과 미국이 물러가고 민족통일정부를 주장하였으나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지요. 결국 그는 남한의 5.10선거에도 참여하지 않고 북의 김일성 정부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였지요. 김구는 결국 반대한민국의 대열에 서게 됩니다.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지극히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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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자유민주공화국의 성공한 나라이며 세계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아끼면서 키워온 나라입니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선왕조의 말기에 기독교 선교사로 와서 불쌍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생명을 바쳐 헌신하신 분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분들이 와서 양반상놈의 신분을 무너뜨리면서 민주주의 교육과 산업, 의료시설을 구축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이승만의 자유 민주 정신으로 건국, 그후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의한 국력증진이 성공하여 오늘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지요. 선교사뿐만 아니라 6.25전쟁에 참전한 외국군인, 12살 화상소녀 살린 미국인 아버지 리처드 캐드 월러더, 임진왜란 때 일본장수 사야가의 귀순,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고증에 앞장 서는 호사까 세종대 교수, 소록도에서 평생을 봉사 헌신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기력이 쇠락해지자 송별회도 없이 편지 한 장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오스트리아의 2 할머니 수녀, 독일 사람으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맡고 있는 이참씨, 북한에 119 구호차를 지원해 주고 있는 인요한 미국인, 일본식민지시대에 일본사람으로서 고아 1000여명을 돌보며 한국 땅에 뼈를 묻은?일본사람 소다, 그리고 한국을 신앙의 조국이라고 섬기면서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며 구원으로 알고 살아가는 외국인들, 이분들은 자기 나라보다 한국의 역사, 풍습, 말, 음식을 더 사랑하며 죽은 다음에 뼈를 한국에 묻기를 원하는 분들입니다. 대한민국은 단순히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한 텃밭이 아니라 세계사에서 선택받은 귀한 사명을 띠고 있는 문명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을 가진 민족입니다.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 달콤한 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 것이 민족의 기본소양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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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은 김일성 주체사상이나 왜곡된 민족주의에 의하여 결코 허물어질 나라가 아니며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아시아의 모범 국가, 세계사에 빛나는 국가로 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어야 하고 애국심이 싹트고 희망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해 주어야 합니다. 결코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시켜 폄훼하거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짓 역사를 세뇌시켜 낙오자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평가할 때에는 항상 그 출발부터 북한의 실상을 함께 비교 분석해야 합니다. 북한 1인독재 체제의 모순된 건국과 역사를 일부러 외면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내부만 들여다보고 사실의 거짓, 과장, 이념화시켜 역사를 왜곡하거나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무책임한 역사의 죄를 짖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를 다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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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김 선생의 글은 단순히 한 교사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교육계 전체의 문제이며 동시에 국가관, 통일문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므로 이번 기회에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한 자리에서 토론하고 평가하는 공개토론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사람은 쉽게 세뇌되는 존재이므로 잘못된 정보에 반복 노출되면 인간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 선생도 사상적으로 변질된 인간이며 그러한 분이 한두 명이라면 모른척하고 그냥 내버려 두겠지만 학자, 학생, 종교인, 정치인, 언론인, 노동자, 예술가 등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합법적 비합법적인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 파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분들이 바른 역사관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새 역사관 국민운동을 벌려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국민들 상호간의 가치관 충돌, 애국심의 결핍으로 인하여 국민통합이 불가능하고 경제 민주화, 사회 정의, 남북 통일 및 남북 화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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