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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기3

작성일
2011-01-31 00:00
작성자
길*철
조회수
2234
첨부파일
1/16일 5시 부처님 열반의 장소인 쿠시나가라로 향하였다. 11시에 춘다의 마지막 공양터에 도착하여 예불드리고 다시 14:30분에 열반당에 도착하였다. 열반 당시 사라쌍수 아래에서 북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고 누우셨는데 발이 드러난 것은 당시의 인도의 풍습이었다. 부처님께서 열반 당시에 제자들이 물었다. 열반하시면 장례는 어떻게 할까요? 답하시기를 ‘장례는 재가신도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너희들은 장례에 신경쓰지 말고 法燈明 自燈明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여라(不放逸)‘하고 열반에 드시었다. 이는 공자님의 君子 自彊不息과도 통하는 것이 아닐까. 위대한 스승의 말씀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나보다. 부처님 열반당시에는 재가신자들이 장례를 알아서 할 것이라 하셨는데, 지금 우리 땅의 스님들은 재가신자들의 장례를 맡으려고 열심이니 세월이 지나면 이리도 변하는가?
저녁에는 한국절인 대한사에 들었다. 오랜 만에 김치도 나오고 감자국이 맛있다.

1/17일 3시30분 일어나서 국경을 넘어 네팔의 룸비니로 간다. 국경에서 수속을 하는 중에 근처 가게를 빌려 아침을 먹었다. 네팔은 인도와 달리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지 못하고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한다. 인도가 편리한 것도 있다. 대신에 네팔의 거리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사람들도 자기 집 앞뿐 만 아니라 마을을 다 쓸고 청소한다. 비록 인도보다도 가난하나 길거리는 훨씬 깨끗하다. 10시 룸비니 도착하여 예불드리고 나오는데 룸비니 앞의 거리는 각국의 절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중에 십자가를 단 조그마한 교회가 하나 유별나게 서 있는데 한국의 목사가 세운 곳이란다. 꼭 이렇게 해야 하는지. 오후 1시반에 부처님이 태자 시절에 살던 카필라궁터에 들렀다.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당시의 벽돌 조각만 딩군다. 주변은 논밭이 기름진 풍요로운 마을이다. 궁터는 경주의 반월성과 흡사한 분위기이다. 부처님이 출가했던 동문을 나서 마을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후5시에 부처님이 성도 후 카필라성을 다시 찾아올 때 아버지인 정반왕이 마중 나갔던 쿠단에서 예불을 드렸다. 당시 부처님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정반왕은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렸으나, 이곳에 도착한 부처님은 마을에서 탁발하고 다니셨다. 왕이 화가 나서 석가가문에 어찌 걸식할 수 있는냐고 물으셨으나 부처님은 ‘대왕이시여, 걸식하는 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입니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석가족을 완전히 떠난 것이다. 저녁에 한국절인 대성석가사에 들었다. 밤새 주변의 숲에서 여우들이 운다. 꼭 애기울음소리 같다.

1/18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3시에 히말라야 산기슭의 마을 탄센으로 해돋이를 보러 출발하였다. 깜깜한 밤중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탄센마을은 해발2000m의 마을로서 옛 불교왕국이었다. 올라가서 해가 뜨기 기다려 해돋이는 보았으나, 안개로 인하여 히말라야 설산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해발2000m이어서 공기는 상쾌하고 거리도 아주 깨끗하다. 아침이니 아이들도 교복을 깨끗이 챙겨입고 학교로 간다. 인도와는 다른 모습이다. 높은 곳이지만 수도도 잘 되어 있고 골목마다 포인세티아, 부겐빌 등의 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마을에서 도마도를 사서 오래간만에 신선한 채소를 맛보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2000m 고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좌우로 깊은 계곡에 아득하게 구름다리가 걸리고 폭포가 그대로 떨어지며 그 사이로 원숭이들이 노닌다. 손오공이 이런데서 놀았나 싶다. 오후 1시30분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있던 랑그람에 도착 예불을 드렸다. 1898년에 여기의 사리탑은 발굴되어서, 부처님 진신사리가 지금은 델리의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사진1 카필라성의 동문 부처님께서는 이 문을 나서 출가하셨다.
사진2 네팔 탄센마을 의 아침. 길거리가 인도에 비하여 깨끗하고 학교가는 아이들도 단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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