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후반 45분씩 초록색 필드를 쉼 없이 달려 골을 넣는 스포츠 경기 ‘축구’. 누구나 한번 쯤 젖은 유니폼을 바람에 휘날리며 골대를 향해 질주해 가는 축구 선수를 향해 박수를 보낸 적이 있을 것이다.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오면 우리는 선수들의 각종 기교나 골인 결과 등을 놓고 칭찬과 질타를 아끼지 않는다. 곧이어 후반전을 맞은 선수들은 이런 대중의 응원에 힘입어 더 멋진 경기를 펼치기에 애쓴다.
과학계 종사자들도 과학이라는 영역의 필드를 종횡무진 누빈다는 점에서 축구 선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가슴에 태극기를, 등에는 연구 분야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우리나라 과학발전을 위해 쉼 없이 뛰어다니게 마련이다. 연구원으로서의 인생 전반전을 그렇게 마친 과학자들은 또다시 후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의료과학의 발달로 100세 장수시대를 맞이하는 이때,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뛰고 있는 손진담 큐레이터(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 김영철 KISTI 정보분석가(전 한국원자력연구원 박사), 오창섭 호서대 교수(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박사)를 만나봤다. 전반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만큼 더욱더 그분들의 후반전 모습이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 꿈, 은퇴 후 이뤄지다…과학대중화 선두주자 손진담 박사
'6.25사변직후 경북 영천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어린시절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커 자연을 기록하는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었죠. 연구소에 근무할 당시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지질현상을 사진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활용해 정리할까 합니다. 이런 작업도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자 작업 영역과 비슷하지 않을까요?'(웃음).
1944년생으로 올해 68세를 맞이한 손진담 박사. 손 박사는 지난 40여 년간 자원개발연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국내 퇴적분지연구와 석유가스자원탐사를 수행했다. 또 2002년부터 과학창의재단 홍보대사로 과학 강연을 다니며 과학 대중화에 힘써왔다.
그에게 지질학을 전공으로 삼게 된 이유를 묻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당시 지질학을 가르치던 대학은 단 한 곳뿐이었고 황무지나 다름없던 지질학과에 손 박사는 과감히 지원했다.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찾아 개척하는 손 박사의 도전정신은 은퇴 후에도 계속됐다.
2005년 정들었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을 정년퇴임한 손 박사는 현재 국립중앙과학관에서 큐레이터 역할을 맡고 있다. 또 개인 연구실에서 지실에세이를 작성하고 있으며, 초·중등생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과학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다.
“과거에 높은 명예와 지위가 있었다고 목에 빳빳이 힘주고 고상한 일만 하려고 하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죠. 과학관 큐레이터 활동, 유치원생들에게 강의도 하면서 과학대중화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주변에서 점잖지 못하다고도 하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일,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습니다.”
손 박사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과학 대중화’다. 그는 “대중들, 특히 어린이에게 다가가 과학을 쉽고 재미나게 전달해줘 이공계 기피현상을 줄이고 고생하는 젊은 과학자들의 기(氣)도 세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손 박사는 과학관 큐레이터 경험을 밑천으로 생태과학관 제작을 기획 중이다. 또 ‘자연과학도는 자연과 더불어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철학으로 서산에서 농장을 일구고 있다. 귀농생활을 꿈꾸며 ‘인생 3모작’ 준비에 나선 것이다. 손 박사는 “개척자로 외로운 길을 걸어왔지만, 돌아보면 가슴 뿌듯하다”며 “또다시 행복한 노후를 위해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철 KISTI 정보분석가, “과학계서 쌓은 경험 후학위해 쏟겠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25년간의 연구 끝에 고속증식로 연구 분야의 토대를 마련한 김영철 박사는 2003년 은퇴 이후 KISTI ReSeat 사업을 통해 정보 분석가란 새로운 직함을 얻게 됐다.
“정보 분석가란 직무를 맡으면서 이전의 경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연구하는 학생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은퇴 후 갖게 된 제2의 인생은 제가 지금껏 쌓아온 경험과 앞으로 쌓아갈 지식 정보를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쏟겠습니다.”
KISTI에서 운영하는 ReSeat 프로그램은 국가 연구계, 학계, 산업계에서 수십 년간 경험을 쌓아온 고경력 은퇴 과학자들을 활용해 과학기술자 양성 및 전문지식을 배양하는 사업이다. 퇴직 후 새로운 삶을 설계해야 했던 김 박사에게 KISTI ReSeat 사업은 또 다른 삶의 목표를 안겨 주었다.
김 박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뜻하지 않게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재생에너지 및 온실가스 감축’을 주제로 최근 동향을 분석하고 한국열환경공학회, 한국에너지공학회 등에 매년 1~3편씩 학회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스연맹지, 중앙일보, TLD에 기고문까지 쓰며 바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과학계서 연구 활동 중인 후배들에게 “젊을 때는 지위, 명예, 돈, 이 3가지 목표가 눈에 크게 들어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발자취가 더욱 뚜렷이 보이게 마련”이라며 “자신에게 맞는 한 가지 목표를 정해 일로정진 함으로써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보라”고 조언했다.
오창섭 호서대 교수, “인생 후배님,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세요”
호서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맡고 있는 오창섭 박사. 학부 4학년과 대학원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하고 이를 통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거나 국내외 학회에 참석해 논문 발표를 하고 있다.
오 박사는 교수가 되기 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에서 20여 년간 연구해 왔다. 그는 연구원에서 에너지절약 연구 및 화석연료 이용 기술을 개발했으며 전산개발에 힘써왔다. 이때 쌓은 실무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을 지도해 제자들의 학업증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에게 연구원으로서의 직무를 마치고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설계하게 된 계기를 묻자 “먼저 국비로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활용하지 않는 건 낭비라고 느꼈고, 일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생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연구원일 때도 큰 성취감을 느껴왔지만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서 현재 지도하고 있는 제자들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후배들에게 “탄탄한 인생 후반부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대가를 바라기 전에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권위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